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이제 4년 넘게 일하고 있다. 나의 하루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 1) 기상 2) 샤워 3) 간단히 식사 4) 스타벅스에서 커피 주문 5)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일 시작. 5번 단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선 회사 내부 서버에서 내 프로젝트의 최신 소스 코드를 다운받고, 새로운 코드를 compile/build한 후에, 프로그램을 debug 모드로 deploy하고 코드 에디터를 켜고 코드를 수정/추가할 채비를 한다.

이러한 과정을 내 머리에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컴퓨터에서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의 수정 가능한 데이터 저장 공간이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장시간, 전원 없이도 저장이 가능하지만 엑세스 속도가 느린 하드 디스크(또는 SSD)와 읽고 쓰는 속도가 훨씬 빠르지만 전원을 종료하는 순간 모든 데이터가 사라지는 RAM이 그것이다. 이 정도 극명한 구분은 아니더라도 두뇌에도 분명 오랜 기간 저장이 가능한 장기 기억 공간과 바로 꺼내어 쓸 수 있는 단기 기억 공간이 존재한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거나 개발하기 위해서 하드 디스크의 데이터를 메모리에 옮겨 놓는 과정이 필요한 것처럼, 고난이도의 두뇌 작업이 요구되는 때마다 필요한 정보들을 뇌의 단기 기억으로 올려 놓는 방법이 있을 것 같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관련되는 정보들을 빠르게 읽을 수 있을 만한 텍스트로 적어 놓은 후 공부/연구/일을 시작하기 전에 빠르게 한 번씩 속독하는 것이다. 미래에는 Elon Musk가 늘 주장하는 대로 brain-machine interface 가 가능해지면 이러한 과정을 기계로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빠른 엑세스가 필요한 정보들을 자주, 가능한 매일 refresh 해주는 작업은 두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꼭 필요한 일인 것 같다.

10월

11Oct17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섭씨 10도에서 20도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날씨. 이맘때 쯤이면 항상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모직으로 된 검정색 후디(hoodie)를 입고 오늘도 어김없이 하버드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다. 저녁 9시 30분이다.

겨울은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 곧 있으면 할로윈, 추수감사절이 다가올 테고 어느새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커지는 눈 쌓인 거리를 두꺼운 코트를 입고 걷게 될 것이다. 10월에서 4월까지의 보스턴의 긴 겨울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1년이라는 단위는 지구의 공전 주기에서 파생되었으므로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겨울이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소산이다. 아, 그러고 보니 거기에 하나의 우연이 더해져서, 내가 지구의 위쪽 절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두꺼운 옷을 입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뉴질랜드에 잠깐 머무르던 때에 수영복을 입은 산타 할아버지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쌓인 눈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새해와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면서 맞이하는 새해는 분명 많은 차이가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의미있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목표는 두 가지 – 정리와 계획. 현재를 즐기기에는 너무 추운 만큼 보스턴의 겨울은 방해받지 않고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계획하기에 적절한 계절이다. 특히 이번 겨울에는 과거를 잘 정리하고 싶다. 물질적인 것이든 형체가 없는 것이든. 한참 전에 사용하던 물건도 잘 버리지 못 하는 성격 탓에 (친구 하나는 이를 두고 “데이터가 유실되는 것을 싫어하는 과학자들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해가 지나갈 수록 점점 짐이 늘어나고 내 마음 속에 쌓여 있는 짐들도 늘어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분명 도움이 되는 ‘데이터’이지만, 내 두뇌의 한정된 역량으로 이들을 잘 저장하고 쉽게 꺼내 보려면 지난 일들은 잘 분류하고 요약해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에 파묻히지 않고 과거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최근에 인공지능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싶은, 더 구체적으로 ‘나’를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졌다.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는 “내가 사는/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법 괜찮은 대답이라고 느껴진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 내재적인 가치(intrinsic value)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는 행위 역시 근본적으로 가치 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나의 존재가 하등의 의미가 없다면.. 어차피 무슨 생각을 하며 살든 큰 상관이 없다. 간단히 말해 어느 쪽이든 크게 손해볼 일은 없다.

다시 이번 겨울의 목표로 돌아와서 두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자면, 첫째, (이 글과 같은) 별 쓸모없는 글을 많이 남기는 것. 아무리 정리되지 않은 글이라도 머리 속에 있는 생각보다는 훨씬 더 가치있는 데이터가 된다. 둘째, 더 많은 것들을 시작할 것. 더 많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즐거워하고, 상처받을 것. 경험으로 얻은 것이 아닌 데이터는 이상하게도 별로 쓸모가 없다.

연결

25Sep17

주말에 뉴욕에 다녀왔다. 긴 하루를 보내고 녹초가 되어 자정쯤 뉴욕에서 출발했는데, I-278 고속도로를 타고 퀸즈에서 브롱스로 넘어가는 Triborough 다리를 건너다가 “New England”라고 적혀 있는 도로 표지판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십년 전까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던 이 미국 북동부의 지역이 이제는 완전히 내 집이구나 싶었다.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 가진 욕구 중 가장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정 장소와, 시간과, 그리고 사람과 연결되어 그 사이에서 특별하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욕망. 그 감정이 너무 커질 때면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찾기가 힘들어질 때가 있다. 아니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 모든 연결 고리가 없어진 다음에도 나의 존재가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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