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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휘소 교수와의 인연에 관하여 --- 1999년 노벨상 수상자 토프트 교수의 편지

  당연히 나는 물리학자로서 이휘소 박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휘소 박사 부부와 여러 차례 같이 어울린 적이 많이 있었다. 특히, 시카고에서 이휘소 박사 부부와 자주 들렀던 화려한 중국식당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휘소 박사는 나의 인생의 전환점에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원생일 때, 그의 여러 논문들을 공부하였으며, 이들 논문은 나에게 과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 나의 박사학위 논문지도 교수인 벨트만 박사는 지중해에 위치한 프랑스령 코르시카 섬 (Corsica)에 있는 카쥐스(Cargese)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최된 하계입자물리학교에 참가하도록 추천하여 주었다. 원래, 벨트만 교수는, 더 유명한 하계학교인 프랑스령 알프스에 위치한 레쥬쉬(Les Houches) 하계학교에 갈 것을 추천하였지만, 나는 최종심사에서 낙방하여, 할 수 없이 '카쥐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카쥐스' 하계학교는 3주동안 개최되었으며, 이곳에서 나는 입자물리학 분야의 권위있는 세계적 학자들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카쥐스' 하계학교의 주관자는 프랑스의 입자이론물리학자인 레비(Maurice Levy) 교수였다. 레비 교수는 이미, 칼텍의 저명한 입자이론물리학자인 겔만(Murray Gell-Mann) 교수와 함께, 강한 상호결합작용을 주고받는 소립자들의 동역학에 관한 모형이론인 소위 겔만-레비 모형(Gell-Mann Levy Linear Sigma Model)을 주창하여 주목을 받고 있었다.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이 모형이론은 핵자들 사이의 강한상호작용을 정확히 기술하지 못하는, 미완의 이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하듯이 이 모형이론의 이론적 구조는 엄청나게 중요하며, 지금까지도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자세하게 이 모형이론의 수학적 체계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만큼 심오한 모형이론이다. 사실 나는 '카쥐스'에 오기 전에, 이 모형이론을 자세하게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이미 이 모형이론의 양자동역학에 관하여 엄청나게 깊이 연구한 이휘소 박사를 만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고 하겠다.

  '레비' 교수가 초빙한 강연자 중 한사람이 바로 이휘소 박사였다. 이휘소 박사는 부인,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린 두 자녀들을 데리고 왔었다. 하계학교 중 나는 그들과 함께, 코르시카 섬 내지 깊숙이 같이 등산을 한 생생한 기억이 있다. 한참 등산한 후,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작은 호수에 도달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한 가족의 젊은 아빠로서 그때 그의 행복한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는,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직 '카쥐스' 하계학교에 참가하였던, 학생 그리고 강연자들이 전부여서 아주 조용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학문의 선배인 이휘소 박사를 이렇게 가까이 본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물론, 이휘소 박사의 강연이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는 중요하였으며, 나의 향후 연구 방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부분이었다. 이휘소 박사와 또 다른 독일의 수리물리학자인 시만직(Kurt Symanzik) 박사가 모두 겔만-레비의 모형이론에 관한 양자현상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나는 '카쥐스' 하계학교에서 이들 두 선배학자의 강연을 가장 흥미롭게 들었다. 사실, '카쥐스' 하계학교에 오기 전, 지도교수인 '벨트만' 교수는 겔만-레비 모형이론에 관하여 전혀 다른 수학적 접근방법을 내게 심어주었으며, 이 모형이론의 중요성을 그다지 강조하지도 않았었다.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의 강연을 경청한 후, 나는 이들의 접근방법이 보다 적절하며, 특히, 당시 내가 풀고자 시도하고 있었던 소위 양-밀 게이지 장이론(Yang-Mills gauge theory)에 아주 유사한 방법으로 적용해 볼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강연 후, 나는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 각각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겔만-레비 모형이론에 대한 양자현상 접근방법을 양-밀 게이지 장이론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두 대가의 대답은 똑같았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당신의 지도교수인 벨트만 박사가 양-밀이론에 관한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그와 상의하여 자문을 구하도록 하세요!".

  '카쥐스' 하계학교를 다녀온 후, 나는 벨트만 교수에게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의 강연에 대하여 설명하고, 또 양-밀 게이지 장이론에 적용하려는 나의 착안도 피력하였다. 그러나, 벨트만 교수는 그다지 신통하지 않다고 느끼는 듯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심층적인 토론과 수많은 계산을 해 나갔다. 당시, 벨트만 교수는 까다롭고 지리한 계산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수행할 수 있는 '스쿤쉽'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는 1970년도이었으며, 손으로 계산하기에는 벅찬 까다로운 계산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수행한다는 발상은 가히 영웅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벨트만 교수는 우리가 같이 설정한 모형이론이 제대로 계산이 되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계산상,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많은 모형이론들의 양자현상 보정효과 계산이 수렴하지 않고 발산하는 적분꼴로 표현된다는 난점이었다. 나는, '카쥐스' 하계학교에서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로부터 배워 응용한 방법이, 벨트만 교수가 제안한 방법보다 더 우수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오랜 설득 끝에 나는 드디어 지도교수인 벨트만 교수가 고집을 꺾고, 내가 제안한 계산방법을 그의 컴퓨터 프로그램에 적용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며칠 후, 벨트만 교수는 계산한 결과를 보여주며 "거의 비슷한 답이 나왔네!"라고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답은 몇가지 맞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했다 -- 서로 상쇄되어 없어지리라 예상한 몇몇 항들이 2배 만큼 차이가 있었다. "내가 보여드린 식을 얼마나 정확히 컴퓨터에 옮겨 적었나요?" 자세히 조사해보니, 벨트만 교수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바꿀 때 숫자 2를 몇 군데에서 빠뜨린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모든 계산들이 예상한 결과대로 나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벨트만 교수가 수년 동안 매달려온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결국 1999년에 이르러서 벨트만 교수와 내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 결정적 내용이었다. 벨트만 교수는 이 분야, 즉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론의 개척자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관한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 분석하였다. 다만, 마지막 결정적인 부분이 내가 중요하게 기여한 부분이며, 이는 모두 이휘소 박사의 업적으로부터 얻은 영감의 결과이다.

  1970년 12월경에 암스테르담에서 대규모 입자물리학 국제학회가 개최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내가 소속한 유트레히트 대학교에서 아주 가까우며, 벨트만 교수는 이 학회의 주관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양자장이론을 다루는 분과발표회의에서 벨트만 교수는 여러 유명한 학자들에게 그들이 그 동안 양-밀 게이지 장이론에 대하여 계산한 결과를 발표를 하도록 먼저 순서를 마련하였다. 이 유명한 학자들의 발표내용을 들으며, 벨트만 교수와 나는 그들 방법론이, 내가 발표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하여 얼마나 쓸데없는 틀린 내용인가를 서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여 당시 나는 전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대학원생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유명한 학자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단지 10분의 발표 및 질의시간 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10분이란 시간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휘소 교수 역시 이 국제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발표한 내용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휘소 박사는 그 당시 진행하고 있던 연구과제들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벨트만 교수가 개발한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 소위 재규격화 방법론의 규명에 본인의 모든 심혈을 기울이기로 결정하였던 것 같다. 명석한 이휘소 박사로서는 우리가 발견한 방법론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도리어 우리의 방법론을 보다 조직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하는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전혀 무명의 대학원생이었던 나로서는, 이휘소 박사와 같이 저명한 학자가 우리의 결과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휘소 박사는 학계를 돌아다니며, 벨트만 교수와 내가 발견한 방법론만이 올바른 방법론임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명의 대학원생이 계산한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휘소 교수는 명성에 걸맞게 아주 정직한 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이 분야에서 보탠 업적이 정직하고 공정하게 평가되도록 항상 노력하였다. 그는, 전혀 반대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많은 미국의 물리학자들과는 달리, 그 자신에 합당한 학문적 기여도 이상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휘소 박사와 오랜 친구인 벨트만 교수는, 그 이후 학회에서마다 그의 불같은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이휘소 박사에게, 이 박사의 논문들이 자신의 업적에 새로운 것을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에 관한한 아무런 공로도 인정할 수 없다고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휘소 박사는 내게 개인적으로 다가와, 벨트만 교수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휘소 박사가 모두 옳았다. 그가 우리의 계산 이후, 이 문제에 관하여 발표한 논문들은 모두 상당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었으며, 그에 관한 업적은 충분히 인정받아야만 하였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에이버스라는 젊은 연구원과 함께, 양-밀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에 관한 긴 비평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비평논문은 이후 엄청나게 많이 인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많은 학자들이 이휘소 박사가 개발한 방법이 벨트만 교수와 내가 원래 개발하였던 파인만 도형을 이용한 증명방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평하게 이야기하자면 이휘소 박사의 논문들은 우리의 것들과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휘소 박사의 논문들로 인하여 국제학계에서 많은 동료학자들이 우리가 개발하였던 방법론이야말로 제대로 완성된 방법임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70년대 초 수년간 이휘소 박사는 양-밀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방법에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되돌아 보건대, 이 때가 가장 즐겁고 흥분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러 가지 이론적인 착안들이 고안되었고 이들 중 논리적으로 보다 타당한 내용들이 살아남았다. 이론적 착안 뿐 아니라 실험적으로도 여러 가지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양-밀 게이지 이론을 바탕으로 구성된 전자기-약력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실험과 이론이 서로 건설적인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중성전류에 의한 실험 결과가 있는가?", "매혹입자 (charmed particles)가 포함된 중핵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가속기에서 새로 발견된 입자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등등, 수많은 이론과 실험의 문제들에서 이휘소 박사는 항상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모든 국제학회에서 이들을 발표하여 전 학계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학자였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는 소식은 정말로 슬픈 뉴스였다. 나는 몇몇 한국 친구들로부터 이휘소 박사의 사고가 최근 한국 내 소설로 미화되어 취급되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 사고는 끔찍한 사고였지만, 트럭 운전사가 트럭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일어난 평범한 사고였었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가족과 함께 시카고에서 하계 연구활동을 위하여 콜로라도의 아스펜으로 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휘소[1935~1977]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화공과에 재학중 1954년 도미, 미국 마이애미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61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입자물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1962년 프린스턴 고급과학 연구소에서 연구 후, 1963년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가 되고, 1966년부터 미국 스토니브룩의 뉴육 주립대학 교수로 있다가 1972년 부터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연구부장이 되고, 시카고 대학 교수를 겸하였다. 1960년대부터 입자의 복합모형이 제창되어 수학의 리군 이론이 많이 사용될 때,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년 이후에 와인버긍A.살람이 입자물리학의 네 가지 힘 중에서 특히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일하여 만든 전기약작용을 재규격화할 수 있다는 이론적 증명을 함으로써 입자 물리학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네번째 쿼크인 참쿼크의 존재가 예견되었을 때, 이와 관련된 이론적 연구업적은 잘 알려져 있다. 1974년에는 서울대학에 국제개발처 교육차관 타당성 조사단의 일원으로 잠시 귀국하여 한국 물리학계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1977년 6월 16일 콜로라도주 국립과학 연구소의 초청강사로 가는 도중 자동차 사고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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