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동 -

저번 표현론 캠프 때 만났던 서울대 강석진 교수.

"축구공 위의 수학자"라는 나름 유명한 책을 지은 분이기도 하다.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책이 있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작가가 쓴 책으로 "훌륭한
수학서적"과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을 받는 책이다.

멋도 모르고 수학을 공부하고 있던 나를 수학의 올가미에 빠져들게 한 악마 같은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특히 내 머리속에 깊이 박혀버린 것은 그 책의 서문에 있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로 내가 수학에 관한 유치한 글을 쓸 때 수십 번도 더 써
먹었던 문장이기도 하다.

오늘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 강석진 교수였다. 한국어
번역판의 감수자로서.

이 사람이 그 악마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재미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지 몇
년은 되었는데 이 글의 한 문장 한 문장이 기억이 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는 그때보다는 더 성숙해졌으니까(또는 오염되었으니까).

젊은 시절의 불타오르는 감정만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그래도,

아마 죽기 전까지는 이 말을 잊어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내 열정의 마지막 불꽃 하나까지 완전히 꺼져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지 ㅎㅎ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도전에 의해 절망할 권리가 있다(Every person has
the right to expose himself to whatever disappointment he chooses). 그 대상이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것일 경우에는 그 절망마저 한없이 아름다울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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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프로페셔널을 위한 鎭魂曲

"페트로스 삼촌과 골드바흐의 추측"
(지은이: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옮긴이: 정회성,
감수:강석진, 출판사: 생각의 나무)


일반 사람들에게 수학자란 어떤 존재일까? 20년 전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하기 시작한 뒤부터 "프로 수학 선수"가 된 지금까지 일반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처음엔 대부분 아주 호의적인 척 한다.

"와--, 머리가 굉장히 좋은가 보네요?"

그리고는 꼭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난 학교 다닐 때 수학이라면 골머리를 앓았는데……"

나는 매번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수학이란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렵거나 딱딱한 것이 아니라 매우 아름답고 시적이며 스포츠 경기처럼 흥미진진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알고 보면" 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 다음엔 한동안 쓸데없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항상 이상한 싸움질이나 일삼는 국회 이야기나, 아니면 신문엔 돈 번 사람들만 나오는데 주위엔 집안을 거덜 낸 사람들만 보이는 주식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는……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그렇게 잠시 동안 이쪽의 반응을 살피다가…… 결국엔 견디지 못하고 묻고 만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 재미있을까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에게 수학자란 "어려운 수학을 재미있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런대로 쓸 만한 머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생을 그런 일에 허비하는 걸 보면 사실은 머리가 나쁜 인간들" 정도로 정리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에 나오는 수학자 페트로스 파파크리토스는 "인생의 실패작"이다. "나"의 아버지와 삼촌(=페트로스의 동생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페트로스를 가리켜 "절대로 닮아서는 안 될 인생의 본보기"라고 경고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자못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페트로스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젊음과 재능을 소진하는 "죄악"을 범했다는 것이다. 남들이 풀지 못하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도전한 것이 무슨 죄냐고 항변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중요한 것은 페트로스가 그 문제를 "풀지 못 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하며, 인생의 비결은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태도 -- 이것이야말로 속세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 제1조 아닌가.

 

수학이란 이차방정식을 풀거나 입체의 부피를 구하는 것 같은 시시한 작업이 아니라 "한없이 흥미진진하며 장엄한 시적인 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직업 수학자가 될 생각을 품고 큰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런데 페트로스는 진정한 수학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나"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수학이란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조화와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므로, 수학에서는 -- 예술이나 스포츠에서와 마찬가지로 -- 최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며,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은 일생을 바쳐 노력해도 기껏해야 "화려한 범재"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지만 이것처럼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 말도 없다. 직업 수학자인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니 12분마다 한 번씩 이 사실 때문에 회의에 빠진다. 그렇지만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애정을 느끼는 대상을 향해 도전할 권리도 없단 말인가.

 

남달리 (그리고 "나"와도 달리) 수학에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페트로스가 젊음을 바쳐 도전했던 "골드바흐의 추측"은 다음과 같이 단순한 문제이다.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素數)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소수"란 잘 알다시피 2, 3, 5, 7, 11, 13, 17, ... 처럼 약수가 두 개 밖에 없는 자연수를 일컫는다. 우선 2보다 큰 짝수들 몇 개만 살펴 보면

 

4=2+2, 8=3+5, 18=5+13, 30=13+17, 50=19+31, ……

 

과 같이 모두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주 쉬운 문제 같지만 10000 정도만 해도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나타내는 방법이 그렇게 쉽게 떠오르진 않는다. 그게 1억 쯤 되면? 또 모든 짝수가 되면?

사실 이 문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리만의 가설", "포앙카레의 추측" 등과 함께 수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꼽히는 것이다. 이 중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지난 1995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앤드류 와일즈 교수가 증명을 완결하여 360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신비의 베일을 벗겼다. (그렇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 눈에 그 신비가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골드바흐의 추측"은 이 문제가 제기된 지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증명을 발견한 사람이 없다. "리만의 가설"과 "포앙카레의 추측" 역시 오랜 세월 동안 미해결인 채 수학자들의 새로운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페트로스가 이렇게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직접적인 동기는 첫사랑 때문이다. 이 부분은 사실 우리 나라 연속극처럼 유치하다. 페트로스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사랑은 프러시아 장교의 늠름한 품으로 도망쳐 버린다. 상처받은 페트로스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여인에게 "극적으로"(즉, 연속극처럼) 복수할 결심을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터무니없게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연속극에는 "사법고시 합격"이라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페트로스는 시대와 문화 배경을 잘못 타고 난 셈이다.

그 뒤에 페트로스가 살아간 인생 행로는 더욱 유치하다. 페트로스는 "리만의 가설"에 대해 공동 연구를 수행하자는 하디와 리틀우드의 제의를 모든 영광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거절한다. "분할 이론"에 대해 수학적으로 중요한 정리를 증명해 놓고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보다 먼저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할까 봐 두려워 발표를 보류한다. 인도 출신의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이 불행하게 죽었을 때는 라이벌이 사라진 기쁨에 은근히 좋아하기도 한다. 자신이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데에 실패한 이유가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 모든 수학적 공리체계에는 증명 불가능한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 --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페트로스 뿐만 아니라 "내"가 취하는 태도도 유치하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무슨 편집증 환자처럼 페트로스를 몰아 붙이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수학자가 되는 길을 포기한 이유라고 들먹인 것들 -- 요절한 천재 라마누잔, 미쳐버린 칸토르와 괴델, 자살로 생을 마감한 튜링 등 -- 을 보면 청소년 정신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이 소설을 "금서목록"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사실 이 책에서 나를 감동시킨 부분도 바로 이런 "유치한" 대목들이다. 직업 수학자의 고독과 아픔이 짙게 배어 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많은 대목에서 같이 기뻐하고 같이 아파했으며 같이 절망했다. 정말 수학자의 고독이란 "대중은 물론 가장 가까운 사람도" 이해하지 못 한다. 수학자의 고독은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다. (따옴표 부분은 물론 내맘대로 바꾼 부분이다.)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수학자'의 불타는 정열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

 

사랑도 '수학'도 모든 걸 요구하는 것

모든 걸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재능마저 벌써 소진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것도 같이 아파한 부분이다. 오죽하면 모든 수학자들은 머리가 하얗거나, 머리가 벗겨졌거나, 위장병을 앓고 있거나, 아니면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농담마저 있겠는가.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말년을 보내던, 이미 미쳐버린 괴델의 모습이 그려질 땐 "신의 영역"에 지나치게 가까이 간 이카루스의 파멸이 떠올라 전율했었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수학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추진하는 動力은 "진리 탐구"나 "인류복지" 같은 진부한 낱말이 아니라 야망과 경쟁심, 그리고 결국엔 영예를 얻으려는 백일몽이라고 토로하는 부분 역시 깊이 공감한 부분이다. 수학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 정리, 증명"으로만 이루어진 무미건조한 구조물 같지만 사실은 인간의 사랑과 야망, 도전과 좌절, 음모와 시기질투, 의리와 배신 등 모든 속물적인 요소들이 어우러진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또한 카라테오도리, 하디, 리틀우드, 라마누잔, 괴델, 튜링 같은 실제 수학자들이 등장하여 흥미진진한 읽을 거리를 제공해 준다. 특히 라마누잔의 신비스런 재능은 읽는 사람을 숨막히는 절망으로 몰아 넣는다. 직업 수학자는 때때로 수학에서 멀리 떨어져 다른 일에 몰두함으로써 수학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내가 이 책에서 배운 매우 소중한 지혜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가슴 깊이 새겨 넣은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도전에 의해 절망할 권리가 있다(Every person has the right to expose himself to whatever disappointment he chooses.)"는 새미 엡스타인의 부르짖음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것일 경우에는 그 절망마저 한없이 아름다울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