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원

17Dec06

우리 중대에 있는 미군 한 명이 정기적으로 고아원에 방문하며 일을 도와 주고 있는데,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중대 사람들 여러 명이 가서 크리스마스 선물 나눠주고 같이 놀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서 가디언 카투사들 중 시간되는 사람들을 불러 통역을 부탁한 것이다. 좋은 일이라고 하니 간다고 하긴 했는데, 어제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잔 피로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사당에 있는 한 고아원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많았다. ‘고아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인지 안쓰러운 눈길로 애들을 바라보면서 우선 가져온 피자를 나눠주며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 중에 9살짜리 꼬마아이 하나가 나를 그 어색함에서 구해 주었다. 손짓으로 날 부르더니 커다란 피자 한 쪽을 건네주며 나보고 먹으라는 것이다. 난 점심 먹었다고 됐다고 했더니 자기도 점심 먹었다며 이번엔 조금 작은 피자 한 조각을 건네준다. 더 놀라운 건 거기 앉아있는 거의 모든 꼬마아이들이 자기들이 먹기 전에 먼저 서있는 우리들에게 피자 한 조각씩을 건네준다는 것이다. 고아원 선생님들이 밖에 있는 부모들보다 교육을 잘 시키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낯선 사람을 많이 보아서인지 어색해함도 없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저사람이 미국사람이냐, 서든어택 하냐 등등. 그 컴퓨터 게임 15세 이상 아니나며 너네가 하면 안 된다고 한 마디 했더니 “그거 19세용이 더 재밌어요. 헤드샷하면 머리에 피터져요” 한다. 컴퓨터 게임은 세상의 아이들을 망쳐놓고 있다.

나도 아이들하고 친해지는건 어느정도 자신이 있던 터라 금방 꼬맹이들 모아놓고 잡다한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자애들은 보통 군대 얘기를 물어보고 여자애들은 이상하게 미군-한국여자 커플에 집착하며 “정말 저 둘이 사귀어요?”하고 몇 번을 물어본다. 군대 얘기 하면서 너희들도 언젠간 군대 가게 될 거라고 했더니 아까 그 9살짜리 남자애가 “아니에요. 보육시설에 5년이상 있으면 군 면제래요.” 라고 하는데 괜히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한 시간정도 이야기 나누다가 선물 주는 시간이 되었다. 남자애들 선물이 플라스틱 포장인 것들이 대부분이고 드라이버가 필요한 것들도 간혹 있었던 덕분에 나는 아이들의 해결사가 되었다. 역시 소형 잭나이프를 휴대하고 다니는건 무척이나 유용하다. ㅋㅋ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고 모두 떠날 때가 되었다. 유달리 정이 많아서 나를 옆에서 떼어놓지 않으려 하던 9살짜리 남자아이는 선물로 받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자고 데려가는데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다시 오면 꼭 같이 놀자고 했더니 “그럼 언제올건데요. 내일 아니면 그다음 내일 아니면 그다음다음내일… 아니면 겨울방학때 와요. 아 근데 겨울방학때는 나 엄마랑 있어야 하는데…” (엄마가 있다는 말에 무척 놀랐다. 그럼 왜 엄마가 키우지 않는지…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만 말이다.)

고아원에서 나오니까 우리 중대장하고 행사를 주도했던 미군이 우리한테 참가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얼떨결에 “it’s no problem, ma’am” 하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고 말았지만, 우리나라의 아이들을 돕는 일을 미군이 주도하고 우리에게 고마워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참기 힘들었다.

그 후 다른 용무가 있어 지하철을 타고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주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이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통해 여러 책들에 많이 등장하던 말, “이웃에게 봉사할 때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 완성된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아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완성된 인간이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One Response to “고아원”  

  1. 1 kakia

    미군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라. 왜 한국언론은 미군에 대한 온갖 비판과 욕설만을 늘어놓는 것일까. 언제나 사람은 惡이 있으면 善이라는 이면도 있는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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