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04Oct14

부끄러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그리 많은 소설책을 읽지 않았다. 내가 읽는 책들의 80% 이상이 비소설류(수필, 인문/사회/자연과학, 여행기, …)이다. 한국의 서점에 가면 항상 스테디셀러 자리에 있는 “상실의 시대” 를 비롯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아직 한 권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고, 몇 달 전 큰 마음먹고 도전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겨우 다섯 페이지를 넘기지 못 하고 접었다. 이번에 신간이 나온다고 해서 관심이 생긴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사분의 일도 읽지 못 한 상태이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라면 알랭 드 보통의 연애소설 몇 권이나, 할리우드 영화 같은 기욤 뮈소의 소설 몇 권이 전부.

나는 소설을 읽을 때면 과도하게 비판적이 된다.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수필보다 더 솔직하다. 삶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소설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 그래서 수필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볼 때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공감하고 동정하며 관대한(?) 마음으로 읽지만 소설을 읽을 때는 ‘무한한 창작의 자유를 가지고 겨우 이 정도 이야기밖에 만들지 못 하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렇다고 내가 더 이야기를 잘 쓸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강남역에 있는 한 중고 서점에 다녀왔다. 고등학교 학습실에 내 친구들의 책상 위에 많이도 널부러져 있던 파란색과 주황색 세트의 “냉정과 열정 사이”. 남들이 많이 하는 것은 하기 싫어하는 이상한 성격 탓에 나는 이 소설을 아직도 읽지 않았었다. 그래도 다른 읽고 싶은 책을 찾지 못 한 까닭에 칠천 원을 주고 이 두 권을 들고 서점에서 나왔다.

지금 나는 미국 보스턴 근처 소머빌이라는 동네의 작은 카페에 앉아 있다. 서점 한 귀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이 작은 카페는 내가 주말 오후에 자주 찾는 곳이다. 창문가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창 밖으로 작은 테라스와 주차장이 보인다. 주택지가 많은 동네라 지나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유모차를 끌고 가는 가족들이다.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이 보인다. 보스턴은 10월부터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동네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천사의 곱슬곱슬한 금빛 머리카락이 서늘한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며 나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황색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가을이니까 당연히, 노라 존스의 음악을 듣는다.

온갖 잡다한 생각이 독서를 방해한다. 며칠 전 서울에서 용인으로 가는 광역버스 안에서 읽은 The Atlantic 지에서 “인터넷이 인간의 ‘읽기’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라는 주제의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말하기, 듣기와는 달리 문자를 읽고 해독하는 작업은 후천적으로 훈련되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작업인데, 컴퓨터 화면에 주사된 글을 대충 스크롤하는 현 세대의 읽기 작업은, “죄와 벌”을 몇주(또는 몇달)에 걸쳐 읽으면서 훈련된 두뇌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요즘들어 나이먹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나의 뇌는 ‘신세대 두뇌’ 인가보다. 겨우 이십 페이지 정도를 읽으면서 떠오른 잡생각이 열 가지가 넘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더 감성적인가, 라이트 로스트 커피는 왜 신맛이 강한가, 내가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가, 왜 사람들은 감자칩을 좋아하나,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환할 때가 벌써 됐는가.. 등등.

파란색 책을 읽고 있던 나를 생각해본다. 지금의 나와는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내 방의 침대 위, 시간은 새벽 3-4시경, 그리고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꽤나 잘 어울리는 광경이다. 어머니가 만든 집에서 지난 기억들을 마약처럼 씹고 있던 나와, 떠나간 사랑에 미련하게 매달리는 남자 주인공.

창문에 빗방울이 지저분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내 생각의 화살표를 현실로 돌려 놓는다. 주말 오후의 한가로움을 즐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창문 밖의 쌀쌀한 냉기가 어느새 내 무릎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오늘 저녁에는 또 무얼 먹어야 하나.


No Responses to “소설”  

  1.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