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광』(김정운, 프로네시스) 이란 책을 정훈이에게 빌려 보게 되었는데 읽다가 무척 흥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우선 오리엔탈리즘이란 개념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하는데, 이 책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 그 자체가 아니라 서양이 제멋대로 만들어진 동양의 모습을 뜻한다.

그리고 일본 문화를 설명하면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이것은 동양에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서양이 원하는 동양을 자발적으로 생산해줌으로써’ 유리한 결과를 취하는 것이라 한다. 일본이 자신의 문화를 세계적으로 퍼뜨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라고 책은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는데,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이다. 그녀는 예쁘다.  또 청순하고 가련하다. 뿐만 아니라 잠자리에서는 더욱 매력적이다. 아, 그 나비부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랴. 그러나 그런 일본 여자는 없다.

서양은 한국 여자도 비슷하게 만들어낸다. 서양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한국 여자는 한결같이 찢어진 눈, 낮은 코, 긴 생머리를 하고 있다. 또 매우 여리고 착하고 순진하다. 우리 눈에는 전혀 안 예뻐 보이는 한국 여자를 그들은 아주 전형적인 한국 미인이라고 한다. 그 순종적인 여인을 동양 남자는 아주 못된 권위적이고 봉건적인 태도로 억압하고 무시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서양 남자들은 이 불쌍한 동양 여자를 폭압적인 동양 남자의 손길에서 구원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듯하다. 이는 지금도 변함없는 아주 전형적인 동양에 대한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중략…)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은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발견된다. 예를 들면 국제영화제 수상을 목표로 하는 영화들이다. 임권택, 김기덕감독의 영화가 우리에게 낯선 이유는 신비적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에 조응하는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이 국제영화제 수상작들이 하나도 안 재미있다. 강수연의 ‘씨받이’만 하더라도 나는 청계천의 침침한 동시상영 극장에서 아주 싸구려 한국식 소프트 포르노(?)로 봤다. 정말 재미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 그 영화의 주인공인 강수연이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자, 그 영화가 대형 극장에서 다시 개봉되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 문화의 미학적 측면을 구현한 영화가 드디어 세계부대에서 제대로 평가 받았다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 강수연이 내던 그 신음소리는 한국적 미학하고는 많은 거리가 있었다. 그 영화에서 묘사된 한국 남자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서양이 보고 싶은 대로 보여준 것이다. ‘씨받이’의 성공 이후, ‘국제영화제 출품작을 목표로 만든 영화’들은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시대의 차이를 두고 요즘 만들어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도 큰 틀에서는 이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외에 자신의 관객이 있다는 것이 그리 자랑할 일이 아닌 것을 왜들 모를까?

논리의 비약이 없진 않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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