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여권

23Sep22

한국에 왔다. 돌아오는데 5년이 걸렸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어서 머리속에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거의 매일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권 만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히 깨달아서 새로 발급을 받았다. 최근에 새로 디자인했다는 파란색 새 여권이 예쁘고 여러모로 품질도 더 좋지만, 크게 VOID라고 구멍이 뚫린 전 여권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마치 내 지난 10년의 기억에도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이다.

상처난 여권을 열어 책을 읽듯이 처음부터 한장 한장 읽어 본다. 토론토, 이스탄불, 파리, 밴쿠버, 더블린, 퀘벡, 서울,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미국 F1 비자, 미국 H1B 비자, … 누군가가 무심하게 찍어 놓은 도장들일 뿐인데 하나하나의 도장에 떠오르는 기억이 너무 많다. 이 기억들이 점점 흐려지는 것도 슬프고 언젠가 내가 사라지면 이들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것도 슬프다. 세상 모든 이들이 나만큼의 기억을 갖고 있을텐데 이렇게 사라지는 기억들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VOID 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4년이 넘도록 긴 휴가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이직 후에 바쁘기도 했고, 코로나 때문에 더 미뤄지기도 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살았는지 휴가를 갖기 전에는 깨닫지 못 했다.

기후 변화 때문인지 9월인데도 서울이 너무 더웠다. 더운 날씨에는 식욕이 떨어지는 체질이라 그런지 한국에서 가족들, 친구들에게 좋은 음식들을 많이 대접 받았는데도 몸이 더 마른 느낌이다. 그와 비슷하게 이 곳에서 새로운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마음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래도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명확한 답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 자주 돌아올 생각이다.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많은 나라이지만 나를 정의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는 나라임에도 틀림이 없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이 나라가 바뀌는 것을 계속 몸으로 느끼고 싶다. 어머니와 내 가족이 있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No Responses to “새 여권”  

  1. No Comments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