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림

01May10

사람들이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나는 주로 두 가지 이유로 그것들을 찾는다. 현재를 잊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과 독립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꺼내기 위하여. 두 가지 모두 별로 건전하지는 않은 것들이다.

속편으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는 아무리 재미가 없다고 해도 꼭 챙겨보고,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것들은 서너 번씩 다시 보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오늘 본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영화는 한국에서도 꽤나 유명한 일본 드라마의 극장판(최종악장 전편) 이다. 물론 예상했던 만큼 훌륭했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았을 때는 2007년 말에서 2008년 초쯤, 전역을 앞두고 말년휴가다 뭐다 해서 집과 부대를 왔다갔다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분명히 현실을 잊어버리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영화를 봤을 때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리는 만큼 그 때의 자신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방법도 없다.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교향곡에 빠져 있을 당시에는 마치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잊은 것 같았지만, 마지막 야근을 하면서의 지루함, 곧 사회로 돌아온다는 기대와 불안, 유학에 대한 걱정, 그리고 외로움이 극 중에서 무척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베토벤 교향곡 7번 속에 또렷하게 저장되어 있다.

어머니의 병실 바닥에 있던 간이침대에서 이어폰을 끼고 보던 Seinfeld. 마지막 편지를 썼던 날에도 집에서 계속 웃긴 시트콤들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분명 나는 그 당시 킥킥거리고 웃고 있었는데 지금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즐겁지가 않다. 자대 배치 첫 날 선임 병장 옆에서 각을 잡고 앉아 보았던 연애시대 덕분에 나는 막사 침대 위의 차가운 하얀 색 린넨의 촉감을 떠올릴 수 있고, 첫 외박을 나와 밤을 새워 연애시대를 다시 보았을 때 새벽에 내 방에 들어와 일찍 자는게 좋지 않겠냐고 했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 밤에 혼자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면서 봤던 비포 선셋은 당시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훨씬 더 아름다웠다.

결국 좋은 영화는 뇌의 바닥 속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당시에 가졌던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함께 묻어 버린다. 그것들이 내가 잊고 싶었던 것이었고, 그래서 절실하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꺼내 보려 하면 모든 것들이 함께 떠오른다.

그러니 정말 바보같다. 잊어보겠다면서 제대로 잊지도 못 하고, 그러고서는 그것을 나중에 다시 꺼내보고 울고 웃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과 같은 허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것들은 어떤 마약보다도 위험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가진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랑을 현실이 아닌 것들에 낭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2 Responses to “매달림”  

  1. 1 차노

    근데 왜 수학은 안떠오를까…;ㅁ;

  2. 2 Taedong Yun

    그러게요. 초등학교때 TV에서 봤던 광고 문구라든가, 어떤 영화에 나온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멜로디라든가 하는 쓸데없는 기억들은 아직 생생한 것들이 많은데 말이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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